[취재파일] 유재학 감독의 "지금 조시라면…" 일본어 불감증
SBS Sports 권종오
입력2015.04.02 13:10
수정2015.04.02 13:10
유재학 감독은 그제(31일) 프로농구 챔피언결정 2차전에서 동부에 이긴 뒤 TV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이날 밤 9시48분에 방송된 KBS1 TV <스포츠뉴스> 동영상을 보면 유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홈에서 2연승을 해서 마음이 좀 놓이고요, 지금 조시라면 원주 가서 그냥 4대 0으로 끝내고 싶습니다.”
그런데 해당 뉴스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유 감독이 말한 내용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홈에서 2연승에서 다행이고 원주 가서 4대 0으로 끝내겠다.”
실제 유 감독이 말한 것과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말은 ‘조시’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일본어로 ‘ちょうし’(調子)라 씁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상태’에 해당합니다. 즉 ‘지금 조시라면’은 ‘지금 상태라면’이란 뜻입니다. 한국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프로농구 최고 명장이 공식 인터뷰에서 ‘조시’라는 일본말을 버젓이 쓴 것은 일단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막론하고 외국어는 도저히 다른 한국어 표현이 없을 때만 사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국민의 시청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 ‘일본어’를 아무 여과 없이 방송한 것입니다. 유 감독의 인터뷰는 생방송이 아니었기 때문에 설사 유 감독이 실수로 일본어를 썼다고 하더라도 편집 과정에서 얼마든지 삭제할 수 있었습니다. 해당 보도의 책임자가 ‘조시’가 일본어인지 몰랐던지 아니면 알고도 그냥 썼던지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국내 스포츠계에는 일본어의 잔재가 유독 많이 남아 있습니다. 1990년대 국내 여자농구 스타인 정은순은 공식 인터뷰에서 “어제 패배를 오늘 반까이해서 기분 좋다”고 말했습니다. ‘반까이’는 ‘만회’(挽回)란 뜻의 일본어입니다 “어제 패배를 오늘 만회해서 기분 좋다”고 말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반까이’라고 한 것입니다. 1998년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에 취임한 정대철 총재는 SBS TV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해 “앞으로 잘 단도리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단도리(段取り, だんどり)는 우리말로 하면 ‘채비’에 가까운 일본어입니다.
일본어는 아니지만 일본식 말도 너무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국내 스포츠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표적 일본식 단어가 ‘시합’입니다. ‘경기’로 순화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대대로 내려오는 습관 때문인지 아니면 워낙 익숙해서인지 거의 대부분의 감독-선수들이 ‘시합’이란 말을 별다른 생각 없이 쓰고 있습니다.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잘 몰라서 생기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과거에 한일전을 앞둔 한국 여자축구대표팀의 한 선수는 ‘대화혼’(大和魂)이란 단어가 새겨진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대화혼’은 일본의 고유 정신, 민족 정신을 뜻하는 단어로 일본인들이 아주 즐겨 쓰는 말입니다.
올해 2015년은 광복 70주년입니다. 식민지에서 해방되던 1945년에 태어난 사람이 이제 70살이 됐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어릴 때 일본어를 배워야 했던 ‘일본어 세대’는 80살이 넘었습니다. 우리 생활에서 일본어를 쓸 필요도 없고, 핑계도 댈 수 없게 됐습니다. 일제 치하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선열들은 온갖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 숭고한 뜻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체육계와 언론계를 비롯한 우리 사회 전체의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SBS 권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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